바람둥이 K에게 빠져버리다
K와 결혼을 준비 중이라고 지인들에게 얘기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드는지
어떻게 "이 사람이다"라고 확신이 들었는지 물어보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K를 너무 좋아했고, 그렇게 그런 감정으로 좋아했던 사람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와 결혼하는 게 당연하다고 막연히 생각하면서 연애를 했던 것 같다. (K는 어떻게 나와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ㅎ)
K를 언제부터 좋아했었을까.. 생각해보면 처음 심쿵 당했을 때부터였다.
처음 만나자마자 너무 공통점이 많았던 우리는, 친구로서 너무 빠르게 친해져서 그럴까..
아무 얘기나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고, 우리가 나눈 스스럼 할 수 있는 얘기는 얼토당토 하지 않은 자뻑부터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한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었다.
같이 나눈 이야기 중 내가 생각할 때 K의 잘난척(show off)이라고 느낀 부분이었으나, K는 "고민"이라고 일 컸던 것은 바로 그의 기억력이 너무 좋다는 것이었다.
처음 들었을 때, '그게 왜 고민이지?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이상하다고 생각되어 물어보니, 자신의 (상상 그 이상) 뛰어난 기억력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K 자신을 좋아한다고 오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지?라고 생각했다.
내가 직접 그의 무시 무시한 기억력을 경험하고 그에게 심쿵을 당하기 전까지는..
K의 기억력은 정말 대단했다.
처음 단둘이 만나던 날, 카페에 먼저 도착해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K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내 앞에 앉았다.
앉자마자 그의 눈은 내가 아닌 내 앞에 놓인 진하고 고소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향해 있었다.
그는 바로 눈을 찌푸리며 내가 마시고 있던 커피 컵을 가리켰다.
"How many?(몇 잔 째야?)"
'왜 물어보지?'라고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그가 고개를 저으며 내 커피를 가져가고 자신이 주문한 주스를 내 앞에 놓아주었다.
"신장 안 좋다며, 커피를 줄여야 하는데 고민이라고 하지 않았어?"
내가 커피를 줄이고 있다고 K에게 얘기한 적이 있던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몇 달 전 한국어 봉사 활동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을 때 지나가듯 묻혀가듯 커피를 안 마시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지키기 참 어렵다고 고민을 얘기했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사소하게 넘기듯 얘기한 것을 기억하고 챙겨주는 그의 모습에 갑자기 심쿵하고 말았다.
처음에 이런 그의 행동들 때문에 K가 알고 보니 교회 오빠 얼굴에 포장된 무시무시한 바람둥이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시간이 지나 좀 더 K에 대해 알게 되고 나서 그는 직장에서 모든 동료 (남자, 여자, 상사, 선배, 그리고 후배) 모두에게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기억하며 챙기는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바람둥이가 아니라 원래 이런 아이라는 걸 깨달았다.
물론 바람둥이가 아닌 그냥 섬세한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다.
이런 그의 기억력이 그의 치명적인 장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어떤 고민을 얘기해도, 사소하게 보낸 나의 지난 하루에 대해 얘기해도 K는 하나하나 주의 깊게 듣고 기억해준다(지금도 역시).
- 그의 이 섬세한 기억력은 나중에 그를 우리 부모님과 언니에게 소개해준 후 사랑을 받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그의 섬세한 기억력 때문에 나는 K를 만나면 만날수록 K가 너무 좋았고, 그가 만약 그의 고민(자신의 기억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그들을 좋아한다고 오해한다)을 나에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좀 더 빨리 그에게 고백하지 않았을까?
난 그가 나를 대하는 것이 다른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혼자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를 짝사랑을 하게 되었다.
(그 또한 내가 마음에 들어서 그렇게 더욱 기억하고 더 섬세하게 챙겨준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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